홍천 동학농민혁명

강원도 홍천군 풍암리 일대의 지명 중에는 동학군과 관련된 곳이 많다. 진등은 동학군이 진을 쳤다고 해서 붙여졌고, 군두리는 동학군과 의병들이 주둔하였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풍암리를 중심으로 서석면 일대의 마을에는 10월 20일을 전후하여 제사를 올리는 집안이 많댜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30여 가구에 달했으나 현재는 16명의 희생자 가족이 제사를 올리고있다.

민초들의 삶을 위해 싸우다 

1894년(고종 31) 1월 고부 농민봉기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을 휩쓴 그 해 가을, 강원도에서도 동학혁명의 불길이 번지기 시작했다. 남집(南接)의 전봉준이 재차봉기를 위하여 9월 14일 삼례로 모이고, 동학교단을 중심으로 한 북집(北接)에서 9월 18일 청산으로 모이라는 최시형의 교명이 있었다. 

그때 오대산 서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홍천군 내면에서 차기석이 기병하자 산하에 1천여 명의 무리가 모였다. 이곳은 길이 막혀 있고 산과 계곡이 험준하여 농민군 이 근거지를 삼기에 적당했다. 그는 농민군을 일으켜 창고에 불을 지르고 호웅하 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으면 그 집을 불 태웠으며 상인들에게서 포목 · 해산물 · 가축 등 재물을 빼앗기도 하였다. 내면 근처에 거주하는 윤태일 · 정창해 · 조원중 · 정운심 등은 차기석 집주(接主)의 이름으로 군사를 모으고, 창고 옆에 목책을 세 워 각 마을별로 집집마다 좁쌀 6말과 미투리 1켤레씩을 거두어 들였다. 진부면의 안영달과 김성칠 등도 농민군에 합류하였다. 

차기석은 박종백과 함께 10월 13일 농민군을 이끌고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동창에 들이쳐서 건물을 불태우고 쌓여있던 재물을 강릉 좌운으로 옮겨가 동학농민군의 세력을 더욱 키웠다. 

조정에서는 지평 현감 맹영재에게 차기석이 이끄는 농민군을 저지하라고 명을 내렸다. 맹영재는 홍천집을 깨뜨린 후 인근 여주 · 이천 · 음죽 둥 경기도 일대에서 농민군을 토벌하고 있었는데 명을 받아 포군을 이끌고 홍천으로 진격했다. 

차기석과 박종백은 농민군을 이끌고 장야촌에서 맞서 싸웠으나 30여 명 의 사상자를 내고 솔치재를 넘어 서석으 로 후퇴하였다. 서석은 동으로 뱃재를 넘어 내면, 남으로는 먼드래재를 넘어 횡성, 서로는 솔치재를 넘어 홍천과 통하며, 북서로는 동창을 지나 내천으로, 서남으로 는 부목재를 넘어 홍천 동면으로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차기석의 농민군과 맹영재의 포군 사이의 전투는 10월 21일 개시되었다. 민포군과 관군은 두 갈래로 나뉘어 풍암리로 진입했다. 다음날 농민군이 맹영재의 토벌대를 맞아 치열한 접전을 벌인 곳은 지금 홍천군 서석면 면사무소 뒤편, 풍암1리와 2리를 가르는 낮은 구릉인 진등이었다. 차기석 군은 토벌군에 맞서 치열한 집전을 벌였다. 조정의 지원을 받는 관군의 화력은 막강하였으며 맹영재가 이끄는 민포군도 대부분 정예의 포수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전력이 대단하였다. 이에 비해 차기석이 이끄는 농민군의 전력은 보잘 것이 없었다. 차기석은 농민군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애를 썼다. 

" 총이 모자르니 버드나무를 깎아 먹칠을 해서 무기가 많은 것처럼 위장하라! 힘을 내라. 주문을 외우면 토벌군의 총에서 총탄이 아니라 빨간 물이 나올 것이다!" 

차기석 이 이끄는 농민군은 부패한 사회를 향한 저항정신으로 그 사기만큼은 하늘을 찌를 듯 했지만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데다 무기라고는 농기구와 몽둥이 뿐이었기에 싸움의 결과는 참담한 것이었다. 이날 희생당한 농민군과 동네 사람들의 수는 8백 명에서 1천명예 이를 것이라고 한다. 관군과 민포군은 농민군의 시체를 고갯길 옆 우묵한 골짜기에 넣고 매장했다고전해진다. 

차기석은 이후에도 많은 전투를 통해 항쟁하다가 11월 11일 내면 원당리에서 전투 중 체포 되어 11월 22일 강릉 교장에서 효수 당하였다. 

동학농민항쟁이 진압된 이후 동학과 관련된 사람들의 토벌이 진행되었는데, 강원도 지역도 예외가 아니어서 참여 농민들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살거나 양반 유생의 의병 대열에 합류하여 탄압을 모면하거나 혹은 화적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동학 교도들의 혼을 위로하는 곳 

서석면사무소에서 200여m 떨어진 풍암1리에서 풍암2리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야트막한 고개를 진등, 혹은 자작고개라 하는데, 이는 여기에서 진을 치고 싸우다 죽은 동학교도들의 시체가 썩어 내려앉아 잦아진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자작고개 옆에는 성황당이 세워져 있어 한 많은 죽음을 당한 동학교도들의 혼을 위로하고 있다. 

수많은 농민군들이 쓰러져 간 자작고개는 점차 사람들이 꺼리는 장소가 되었고 비만 오면 인골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70년대 초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고갯길 확장 사업을 하던 중 인골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와 비로소 이곳이 치 열한 동학농민군의 전쟁터 였 음이 알려졌다고 한다.

이에 군민들이 농민군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성금을 모아 1977년 11월 자작고개 마루에 위 령탑을 세웠다. 위 령탑에 쓰여진 글귀는 다음과 같다. 

"나라의 안팎이 어지럽고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이 노골화되던 1894년, 구국제민의 기치를 높이 들고 동학농민군은 총궐기하여 혁명을 소리높이 외쳤다. 그 혁명의 이념은 안으로는 봉건주의의 타파였고 밖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타도였다.  .... 이러한 찬란한 무명의 영령들 앞에 명복을 비는 정성을 모아 탑을 세우고 이들의 애국혼을 오늘에 되새겨 우리들 마음의 등불로 삼고자 한다."

동학농민군들은 인간평동의 실현, 사회비리의 척결, 외국 침략세력의 배축이라는 대의명 분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봉기하였다가 수십 만의 희생자를 낸 채 실패하였다. 하지만 농민들을 중심으로 한 민중의 사회개혁 요구는 조선 후기 부패한 전근대 체제의 개혁 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곧이어 일제의 침략에 맞서 구국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의병 항쟁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일제하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홍천 퐁암리 동학혁명군 전적지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505-1